연결된 세계에서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사람들
인류의 마지막 세대는 핵전쟁이나 기후재난 속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해 왔다. 그러나 어쩌면 마지막은 폭발음과 함께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출근하고, 영상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때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만 서로를 만나지 않고, 만지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렇게 인류는 소리 없이 다음 세대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몸으로 드러내는 세대가 Z세대인지도 모른다.
2022년 킨제이 연구소 등이 함께 진행한 조사에서는 Z세대 성인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파트너와의 성관계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미국 종합사회조사(GSS)를 분석한 자료에서는 지난 1년 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은 18~29세의 비율이 2010년 12%에서 2024년 24%로 두 배가 됐다. 이 흐름을 두고 ‘섹스 불황’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섹스를 덜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원하는 방식, 관계를 시작하는 방식,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험해졌다
Z세대가 욕망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이전 어느 세대보다 성과 관계에 관한 콘텐츠를 많이 접한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매력적인 얼굴과 몸, 연애 기술, 성적 취향, 관계에 대한 조언이 끝없이 흐른다.
그러나 욕망에 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실제 욕망은 오히려 어려워진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본래 불완전하고 서툴다.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고, 거절당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비교되고 기록된다. 외모와 경제력, 말투와 정치적 태도, 연애 경험까지 평가 대상이 된다.
예전에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용기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용기뿐 아니라 평판과 안전, 윤리와 정체성, 온라인 기록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 선택은 패배가 아니라 위험 관리가 된다.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 수 있다.
미투 이후 남성은 위축됐고 여성은 여전히 불안하다
“미투 이후 남성들은 위축됐고 여성들은 불안의 독기를 안고 산다.”
이 문장은 오늘날 젊은 남녀가 놓인 기묘한 대칭을 보여준다.
미투 운동은 오랫동안 은폐됐던 성폭력과 권력형 범죄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동의와 경계에 대한 사회적 감각을 바꾼 것도 중요한 성취다. 문제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지만, 그 규칙 속에서 친밀함을 만들어가는 법은 충분히 학습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일부 남성은 자신이 호감을 표현하는 순간 가해자로 오해받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실수하거나 거절당하는 것보다, 자신의 행동이 캡처되고 공유되고 사회적으로 심판받는 상황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다가가지 않는다. 확실한 신호가 오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으며, 확실한 신호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은 여전히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임신과 피임 실패, 디지털 성범죄의 위험을 현실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뒤 임신과 출산에 관한 법적 불확실성까지 커졌다. 일부 밀레니얼·Z세대가 성관계에 더 큰 불안을 느끼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남성은 잘못 다가갈까 봐 멈추고, 여성은 잘못된 사람을 받아들일까 봐 경계한다.
한쪽의 공포를 과장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의 공포만 진짜라고 말해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두 불안은 성격과 위험의 크기가 같지는 않지만, 관계의 출발점을 동시에 얼어붙게 만든다. 서로에게 가까이 가기 전에 서로를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랑이 시장이 된 시대
스마트폰과 데이팅 앱은 만남의 가능성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그러나 가능성이 늘어난 만큼 선택의 피로와 자기비하도 커졌다.
수많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넘길 수 있는 환경에서 한 사람은 더 이상 우연히 만난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언제든 더 나은 후보로 교체될 수 있는 프로필이 된다. 사람들은 선택하는 동시에 선택받기 위해 자신을 상품처럼 다듬는다.
사진은 더 매력적이어야 하고, 소개 문장은 더 영리해야 하며, 취향은 더 세련되어야 한다. 대화가 조금만 지루해도 다음 사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만큼 자신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랑은 원래 시간을 들여 타인의 결점을 발견하고, 그 결점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플랫폼은 결점을 발견하는 순간 새로운 선택지를 보여준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택을 미룬다. 더 나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눈앞의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 결과 관계는 시작되기 전에 비교되고, 깊어지기 전에 종료된다.
금욕은 정말 쿨해진 것일까
‘Is celibacy cool now?’
금욕이 쿨해졌다는 표현에는 일정한 진실이 있다. 일부 젊은 세대에게 연애와 섹스를 하지 않는 삶은 결핍이 아니라 자율성의 선언이다. 관계에 소모될 시간과 감정을 자신에게 투자하고, 불편한 타협을 거부하며, 혼자서도 완전한 삶을 만들겠다는 태도다.
특히 여성에게 비연애와 비혼은 과거보다 훨씬 실질적인 선택이 됐다. 경제활동과 사회적 독립이 가능해지면서 생존을 위해 결혼해야 할 이유가 줄었다. 불평등한 가사노동과 돌봄, 경력 단절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통적인 가족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남성 역시 연애 시장에서 반복되는 거절과 경제적 부담, 비교와 평가를 피하고 디지털 오락이나 개인적 취미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그러나 자발적 금욕과 관계를 원하지만 포기한 상태는 구분해야 한다.
혼자를 선택한 사람과 혼자밖에 선택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연애하지 않고 섹스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한쪽은 자유이고 다른 한쪽은 체념이다.
오늘날 ‘솔로 라이프’라는 세련된 언어 뒤에는 독립적인 삶뿐 아니라 거절당할 두려움, 경제적 불안, 낮은 자존감, 관계 기술의 상실이 함께 숨어 있을 수 있다.
팬데믹보다 먼저 시작된 고립
이 흐름을 미투 운동이나 팬데믹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밀레니얼 세대부터 이미 이전 세대보다 성관계 빈도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원인이라기보다 가속기였다. 사람들은 타인과의 접촉을 위험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웠고, 학교와 직장, 모임과 취미 활동이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낯선 사람을 만나고 관계가 발전하던 공간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더 깊은 배경에는 경제가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 치솟은 주거비, 교육비와 양육비는 사랑을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로 바꾼다. 자신의 생존조차 확신할 수 없는 사람에게 결혼과 출산은 축복이 아니라 장기 부채처럼 보인다.
과거 세대는 사랑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의 세대는 함께 살 집부터 계산한다. 아이를 갖고 싶은지를 묻기 전에 아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사랑은 아직 낭만이지만, 가족은 재무제표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먼저 보인 미래
한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저출생과 비혼, 비연애 현상은 서구 사회가 앞으로 마주할 미래를 먼저 보여주는 듯하다.
이 지역의 청년들이 유난히 사랑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주거와 고용이 불안정하며, 결혼 이후 남녀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무겁기 때문이다. 관계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보다 새로운 책임과 갈등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면, 사람들은 관계를 피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연애와 결혼은 개인적인 선택인 동시에 계층 이동과 주거, 가족 간 결합, 돌봄노동이 얽힌 거대한 프로젝트다.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족과 두 경제 상황, 두 종류의 미래를 합치는 일이 된다.
사랑이 너무 무거워지면 사람들은 가벼운 관계를 택할 것 같지만, 오히려 아무 관계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원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대
Z세대의 비극은 사랑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공정하며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증언을 접했고, 이혼과 불행한 결혼을 보았다. 부모 세대의 희생과 경력 단절을 목격했고, 온라인에서 타인의 외도와 배신, 공개적인 이별을 실시간으로 소비했다.
관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성숙한 현실감각이 들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환상을 완전히 잃은 인간은 사랑을 시작하기 어렵다. 사랑에는 최소한의 오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함께하면 삶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실패하더라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이 필요하다.
Z세대는 그 낙관을 갖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경계한다. 누구보다 연결돼 있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외로움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인류의 마지막은 욕망의 종말이 아니라 신뢰의 종말일 수 있다
인류가 정말로 다음 세대를 만들지 않게 된다면, 그 이유는 섹스가 촌스러워졌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미워해서만도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자신의 몸과 시간, 감정과 미래를 맡길 만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출산은 생물학적 행위이기 전에 미래에 대한 신뢰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이 사회가 계속 존재할 것이며, 다음 세대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행동이다. 반대로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선택에는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불신이 담길 수 있다.
Z세대는 사랑을 거부하는 세대라기보다 사랑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가는 세대다. 가족을 싫어하는 세대라기보다 가족을 만드는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을 정확히 계산하는 세대다.
그들이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비난이 아니라 경고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출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서로를 덜 두려워해도 되는 사회다. 거절해도 보복당하지 않고, 다가가도 범죄자가 되지 않으며, 관계가 실패해도 삶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사회다. 집과 일자리, 돌봄과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사랑이 생존을 위협하는 모험이 되지 않는 사회다.
인류의 미래는 출산율 통계보다 먼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지막 세대가 될 가능성을 품은 Z세대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발명할 첫 세대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침묵을 동의로 오해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욕망을 표현하며, 성별에 따라 희생을 떠넘기지 않는 관계 말이다.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마지막은 거대한 파국이 아니라 조용한 방 안에서 찾아올 것이다.
각자의 화면 앞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는 방식으로.
자료와 편집 주석
- Institute for Family Studies, “The Sex Recession” — 미국 종합사회조사에서 18~29세의 지난 1년 무성관계 비율이 2010년 12%에서 2024년 24%로 늘었다는 분석입니다.
- Indiana University Kinsey Institute, “An Intimacy Crisis” — Z세대 성인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파트너와의 성관계 경험이 없다는 조사 맥락을 확인했습니다.
- 추가 참고: 슬로우레터 「Z세대가 섹스를 안 하는 이유」.
조사마다 Z세대의 연령 범위와 질문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세대 전체를 진단하거나 개인의 성·관계 선택을 평가하는 건강정보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해석한 에세이입니다.